책소개
왕궈웨이의 새로운 문예비평 패러다임
왕궈웨이의 문예미학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인간사화≫에 대한 역주서다. 시대의 선후에 따라 전국시대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인, 사 작가, 사 작품을 논해 중국 사를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원의에 가장 부합하는 판본을 번역의 텍스트로 삼아 ≪인간사화≫의 진면목을 두루 살필 수 있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중국 근대의 저명한 학자 왕궈웨이의 ≪인간사화≫를 번역하고 꼼꼼히 주를 달았다. 사화는 사 창작의 본질, 수사, 사 작가와 작품 및 시대에 대한 평가, 사 작가들의 행적이나 창작 배경 등을 논하는 것이다. 일찍이 서양의 철학과 미학, 문예 사상 등을 접했던 왕궈웨이는 사 창작을 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문예 미학을 융합해 참신한 문예 미학관을 정립하고, 새로운 문예비평의 패러다임을 세웠다. 이 결과물이 ≪인간사화≫로, ‘경계(境界)’를 문예 미학의 최고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인간사화≫ 전체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완전한 역주서
≪인간사화≫는 원래 왕궈웨이가 생전에 친히 64조목으로 편정하여, <국수학보(國粹學報)>에 발표했는데 후인들이 연구하고 주소하는 과정에서 유고를 수집해 증보하여 권1 ≪인간사화≫ 64조목, 권2 ≪인간사화 미간고(未刊稿)≫ 50조목, 권3 ≪인간사화 산고(刪稿)≫ 13조목, 권4 ≪인간사화 부록(附錄)≫ 28조목의 체제를 구성했다. 판본에 따라 권수나 조목 수가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왕궈웨이의 원의에 가장 부합하는 체제로 평가받는 삼민서국본의 편차로, 이를 번역의 텍스트로 삼아 ≪인간사화≫ 전체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왕궈웨이의 문예미학의 핵심 ‘경계’
왕궈웨이는 ‘경계’를 문학의 최고 이상으로 여겨 문학의 예술 미학을 추구했으면서도, 또한 인간의 삶과 인생 근원 문제를 둘러싸고 사유를 진행하여 인간의 완미한 경지를 추구하는 인간 미학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그의 경계설은 중·서 문예 미학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경계’설은 중국 전통의 천인합일·물아일체 등의 관념, 노장(老莊) 등의 무위자연 철학 사상, 중국 전통의 미학·문예 사상 등에 연원을 두고, 서양의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 미학, 문예 사상의 영양을 섭취하고 각종 미학, 철학 개념을 빌려 이루어졌다.
200자평
왕궈웨이의 문예미학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인간사화≫에 대한 역주서다. 시대의 선후에 따라 전국시대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인, 사 작가, 사 작품을 논해 중국 사를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원의에 가장 부합하는 판본을 번역의 텍스트로 삼아 ≪인간사화≫의 진면목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지은이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자가 징안(靜安), 호는 관탕(觀堂)으로 저장(浙江)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났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로 문학, 희곡, 미학, 사학, 갑골학, 돈황학, 금석학, 역사·지리학, 판본·목록학 등의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일찍이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철학·미학 사상을 연구했으며, 서양의 철학, 미학, 문예 원리로 중국 고전 문예를 비평한 인물이다.
1901년 뤄전위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갔지만 반년도 못 되어 병으로 귀국했다. 뤄전위의 추천으로 상하이난양공학(上海南洋公學), 퉁저우사범학교(通州師範學校), 쑤저우사범학교(蘇州師範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철학, 심리학, 윤리학 등을 가르쳤다.
1906년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가서 교육부의 직무를 맡았다. 이 시기에 미학, 문학 이론, 희곡 예술사를 연구해 ≪인간사화(人間詞話)≫,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를 저술했다.
1911년 신해혁명 후, 뤄전위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교토(京都)에 머물렀는데, 청조의 유로(遺老)로 처세했다. 이 시기 고문자학, 음운학, 고기물학(古器物學), 갑골문, 사학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1916년에 귀국해 상하이에 거주했는데, 유태인 하둔[Silas Aaron Hardoon, 중국식 표기는 하퉁(哈同)]의 초빙을 받아 <학술총간>의 편집을 맡았고, 아울러 하둔이 설립한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의 교수를 겸했다. 이 시기 갑골문, 고고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1923년 청 대(淸代)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문학 시종이 되었는데, 다음 해 펑위샹(馮玉祥)이 베이징정변을 일으켜 푸이를 출궁시키고 황제의 존호를 폐하자, 비분강개하여 진수이허(金水河)에 투신해 청을 위해 순국하려 했다.
1925년 칭화대학(淸華大學) 국학연구원 교수로 초빙되어, 량치차오·자오위안런(趙元任)·천인커(陳寅恪)와 함께 칭화대학 국학연구원의 ‘네 명의 석학 지도교수’가 되었다.
1927년 6월 2일 이허위안(頤和園)의 쿤밍호(昆明湖)에 몸을 던졌다.
옮긴이
조성천은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왕선산시론연구(王船山詩論硏究)>로 석사 학위를, <왕부지(王夫之) 시학(詩學)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고등학교, 홍익대학교사범대부속여고 교사, 고려대학교, 홍익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2012년 현재 을지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왕부지(王夫之) 시론 연구 논문으로 <왕부지 시론상의 ‘흥회(興會)’ 개념에 대한 고찰>, <왕부지 시론상의 ‘현량(現量)’에 대한 시가 미학적 고찰>, <왕부지 시론상의 ‘의세(意勢)’론>, <중국 시론상 ‘흥회(興會)’의 역사성과 문예미학적 의의>, <왕부지 ‘흥관군원(興觀群怨)’에 대한 해석과 운용>, <왕부지 시론상의 ‘온유돈후(溫柔敦厚)’론>, <왕부지 ≪시역(詩譯)≫의 ‘간지(簡至)’·‘운의불쌍전(韻意不雙轉)’론 고찰>, <왕부지 시론의 형성배경(1)-부형(父兄)과 스승의 영향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차례
권1 인간사화
권2 인간사화 미간고
권3 인간사화 산고
권4 인간사화 부록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문학이란 작가가 내부로는 자신의 뜻을 충분히 펼치고 외부로는 독자를 충분히 감동시키는 것으로, 그 관건은 ‘작가의 뜻[意]’과 ‘경물[境]’ 두 가지일 뿐이다. 최상의 문학은 ‘작가의 뜻’과 ‘경물’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고 그다음은 경물이 뛰어나거나 혹은 작가의 뜻이 뛰어난 것이다. 만약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